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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푸는새 2016. 8. 21. 14:38



내가 열세 살이었을 무렵, 세계는 훨씬 단순했다. 노력은 당연히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말은 보증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아름다움은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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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물의 신선한 모습은 볼 줄은 알았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냄새가 제대로 풍겼고, 눈물은 진실로 따뜻했으며, 여자애는 꿈처럼 아름다웠으며, 로큰롤은 영원히 로큰롤이었다. 영화관의 어둠은 우아하고 친밀했으며, 여름밤은 끝없이 깊고 관능적이었다. 그러한 초조한 나날을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과 더불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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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말(馬)이 죽었다. 인디언의 북 치는 소리도 멎었다. 너무 조용하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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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으면 네가 전화를 걸면 돼. 사람과 사람이 의무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어. 만나고 싶어지면 만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서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털어놓아서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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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내버려두면 몸 안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는 수가 있어. 억제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거야. 이따금 바람을 빼주지 않으면, 펑하고 폭발해 버려. 알겠어? 그렇게 되면 살아가기가 어려워져. 무엇인가를 혼자서 떠맡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야. 너도 괴롭고 나 역시 괴로울 수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솔직하게 말이야.


일주일이 지나갔다. 봄이 발걸음을 다지며 확실하게 전진해 가는 일주일이었다. 봄은 한 번도 뒷걸음질치지 않았다. 3월과는 전혀 다르다. 벚꽃이 피었으며, 밤비는 그 꽃잎들을 흩날려 버렸다. 선거가 어느덧 끝나고, 학교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도쿄 디즈니랜드가 개관했다. 비외른 보리가 은퇴했다. 라디오 톱텐의 1위는 줄곧 마이클 잭슨이었다. 사자(死者)는 죽 사자인 채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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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려요" 하고 유미요시는 특별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마치 온 세계의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처럼 들렸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좋아한다든지, 사하라 사막에는 비가 별로 내리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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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하고 그녀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가 된 듯이 말했다. TV의 뉴스 캐스터 같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네 , 그럼 다음 뉴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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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나갈 때, 그녀는 으레 그 카세트 라디오를 갖고 갔다. 물론 들고 가는 건 내 역할이었다. 나는 그것을 타잔 영화에 나오는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원주민처럼 어깨에 둘러메고("주인님, 더 앞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악마가 살고 있어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디스크자키는 논스톱으로 팝송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해 봄에 유행하고 있던 곡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청결한 역병처럼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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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성장하고 싶지 않아요."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라고 나는 말했다. "싫어도 모두들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문제를 안은 채 나이를 먹고, 모두들 싫어도 죽어가는 거야. 옛날부터 죽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너만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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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가 좋은 게 아냐. 단지 애정을 기울여 정성스레 만들었을 뿐이야. 그러기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자세의 문제야. 여러가지 사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어.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거군요?"

"그 이상은 운이야"라고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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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네가 새라고 하자"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주 날 수가 없어. 날씨나 풍향이나 계절에 따라 날 수 있을 때와 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하지만 날 수 없는 날이 계속되면, 힘도 남아돌고 초조해져. 자신이 부당하게 깍아내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날 수 없을까 하고 화도 나고 말이야. 이런 느낌을 알 수 있겠어?"

"알 수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럼 얘기는 간단해. 그게 성욕이야."


이윽고 무슨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의 뒤축이 딱딱한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그 구두 소리는 천장이 높고 인기척이 없는 복도에, 기이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랗게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태고의 기억과도 같은 무겁고 메마른 음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음향은 나의 지금의 존재를 약간 뒤흔들어놓았다. 갑자기 나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해서 바짝 말라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이유로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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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넓은 방이었다. 텅 빈 채 공기가 정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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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저씨 기분을 잘 알 수 있어요."

"난 잘 알 수 없어."

"무력감"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쩔 도리가 없는 그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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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양키스와 오리올스의 시합이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시합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쩐지 TV를 켜두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 현실적인 것과 이어져 있다는 표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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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다행이군요' 라는 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그밖에는 무엇 하나 긍정적인 언어 표현을 생각해낼 수 없고, 또 침묵이 부적당하다는 위기적 상황일 경우로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물론 아메는 그런 걸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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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는 그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긴 실제로 연기를 빨아들인 건 두세 모금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어 잔디밭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은 내게 시간의 유해 같은 것을 상기시켰다. 그녀의 손 안에서 시간이 잇다라 죽어가며 불태워져 하얀 재로 변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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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인 시공간 이동과도 같은, 실체가 없는 10분간이었다. 그녀는 시간의 경과라는 현상에 통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들 속에는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지위가 매우 낮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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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러에 나란히 비치는 세 사람의 모습은 아주 기묘했다. 딕노스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흔들고, 아메는 팔짱을 낀 채 멍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고, 유키는 옆쪽을 향해 샌들 끝으로 돌을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우주의 가장자리에 남겨진, 불완전한 일가족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도 나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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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면 재떨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가만히 재떨이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도 '왜 재떨이 따위를 바라보고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좋든 싫든 나는 혼자 보내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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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게 되자,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급속하게 중력이 변화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사고는 그런 중력의 변화를 잘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멋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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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잠시 후에 유키가 말했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돼"라고 나는 말했다. "말로 나타날 수 없는 걸 소중히 하면 돼. 그게 죽은 이에 대한 예의야. 시간이 지나면 여러가지를 알 수 있어. 남아야 할 것은 남고, 남지 않을 것은 남지 않거든. 시간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줘.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걸 네가 해결하는 거야. 내 말이 너무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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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이라는 건 어이없이 죽어버린느 거야. 사람의 생명이라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한 거야. 그러니까 사람이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이면 성실하게.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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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블라우스 옷깃에 달린 레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레이스는 고상한 동물의 청결한 내장 주름처럼 보였다. 재털이 속에서 그녀의 세일럼이 조용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연기는 훨씬 위쪽으로 올라가 분해되고, 침묵의 먼지와 동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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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바람에 날려가듯이 그저 그곳으로 운반되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해 그녀는 무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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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녀들 모녀와 식탁을 마주하는 일을, 나로선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멍한 눈을 한 어머니와 사자()의 느낌, 무거운 공기, 영향을 주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 침묵,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밤, 그런 정경을 상상하기만 해도, 위가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이상한 나라의 얄리스>에 나오는 미치광이 모자 장수의 차모임이 훨씬 나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치에는 맞지 않을망정 일단은 움직임이라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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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너무 뻔하다 싶을 만큼 진부한 줄거리로 평범하게 진행되어 갔다. 대사도 진부할 뿐만 아니라 음악도 잔부했다. 타임캡슐에 넣어서 '진부'라는 딱지를 붙여 땅에 묻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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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있어주었다. 작고 따스한 손이었지만, 어쩐지 현실의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따스하고 작은 감촉은 과거 기억의 재현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따스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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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미치는 한도의 범위로부터, 감정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했다. 그건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내 감정은 처음부터 벌에 쏘인 것처럼 멍하니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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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언젠가는 사라지는 거야. 우리는 모두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어.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이동함에 따라 언젠가는 사라져버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라질 때가 되면 사라진다고. 그리고 사라질 때가 올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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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뚫어지게 바라보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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