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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글

양을 쫓는 모험

태엽푸는새 2016. 9. 1. 20:38

신문을 보고 우연히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친구가 전화로 내게 그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가 천천히 읽어준 조간신문의 일단 기사는 꽤 평범한 내용이었다. 대학을 갓 나온 풋내기 기자가 연습 삼아 쓴 것 같은 서툰 문장이었다.

몇 월 며칠, 어딘가의 길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운전하는 트럭에 사람이 치였다. 그 사고를 낸 누군가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 중이다.

그 친구가 읽어준 기사는 잡지의 속표지에 실려 있는 짧은 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9


그녀의 아버지는 오십대 중반으로 왜소한 편이었는데, 검은 양복의 소매에 상장을 두르고 문 옆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직후의 아스팔트 도로를 연상케 했다.


11


"1년 동안 뭐하며 지냈어?"라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여러 가지지 뭐"라고 나는 말했다.

"조금은 현명해졌어?"

"조금은."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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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게서 찾던 것은 다정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분이 묘해진다. 어쩌다 공중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손을 짚은 것처럼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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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분 나쁜 꿈을 꾸는거야?"

"자주 그래. 대개는 자동판매기에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는 꿈이지만 말이야."

그녀는 웃으며 내 무릎에 손을 얹어놓았다가 치웠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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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말하고 싶은 건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법인가 봐. 그렇게 생각 안 해?"


20


"저, 10년이란 세월이 영원처럼 느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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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걱디 시작한다. 바다에 대한 건 그만 잊어버리자. 그런 건 아주 옛날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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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밑의 빨간 구두를 발견했다. 눈에 익은 빨간 구두였다. 그것은 흙투성이 테니스화와 싸구려 비치 샌들 사이에 끼여, 철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보였다. 구두 위에는 미세한 먼지와 같은 침묵이 떠 있었다.


29


"설명하는 게 아니야 그저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브래지어 끈을 원피스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언젠가 사진에서 본, 바다 밑에 가라앉아버린 거리가 떠올랐다.


34


"저어, 내가 죽어도 그렇게 술을 마실 거예요?"

"술을 마신 것과 장례식은 관계 없다고. 관계있었던 건 처음 한두 잔 정도겠지."


35


꼬박 스물네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것에 비해서는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나른했지만, 머리만은 숙달된 수생 동물처럼 마구 얽힌 의식의 수로를 목적도 없이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다.


40


우리는 서로의 역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나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구원할 길은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그녀의 슬립 몇 장과 함께 내 앞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떤 사람은 잊혀지고, 어떤 사람은 모습을 감추며, 어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44


그녀는 카메라맨이 충고해준 대로 그다지 신통치 않은 여자였다. 옷차람도 얼굴 생김새도 평범해서 이류 여자대학의 합창단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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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수석 웨이터가 확신에 찬 구둣발 소리를 내며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외아들의 사진이라도 내보이듯이 싱긋 미소 지으며 포도주의 라벨을 나에게 보여주고, 내가 끄덕이자 기분 좋은 작은 소리를 내며 마개를 딴 다음 잔에 조금씩 따라주었다. 식비가 응축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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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맛있는 프랑스 요리는 실례가 되지 않아요."

"귀에 대한 이야기는 실례인가요?"

"그렇지도 않아요. 이야기하는 각도에 따라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각도에서 이야기하죠."

그녀는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그게 가장 좋아하는 각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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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뭔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다섯 개의 빈 접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멸망한 행성의 무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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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따분한 인생이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요컨대 별 도리가 없다는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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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하고 자고 싶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76


그의 머리 뒤에는 석판화가 걸려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그림으로, 날개 달린 물고기 그림이었다. 물고기는 제 등에 날개가 달려 있다는 데에 그다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용법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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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일 따위는 아무 데도 없는 거라고. 성실한 호흡이나 성실한 오줌이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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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를 만나고 싶소"라고 남자는 말했다. 장갑으로 책상 위의 먼지를 털어내는 듯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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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놀라울 만큼 천천히 흘렀는데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대한 기계장치의 볼트 하나를 연상시키는 차갑고 냉랭하고 경직된 분위기에 휩싸인 30분이었다. 내 친구는 은행에서 돌아왔을 때, 방 안의 공기가 몹시 무겁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못으로 바닥에 고정된 듯한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101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존재로 받아들이냐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문제이고, 그 때문에 도넛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116


창밖에는 새파란 여름 하늘과 흰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맑게 갠 하늘이었지만, 왠지 오래 써서 낡은 중고품처럼 보였다. 경매에 붙여지기 전에 약용 알코올로 보기 좋게 광낸 중고품 같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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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의 당나귀가 좌우에 같은 양의 꼴을 놓고 어느 쪽부터 먹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굶어 죽어가는, 그런 종류의 비애가 그 건물에는 감돌고 있었다.

129

아무런 계획 없이 되는 대로 아무 역에 내리면 작은 로터리가 있고, 그곳 안내도가 있고, 상점가가 있지. 어디나 똑같아. 개의 생김새까지 똑같지.

138

이 세상의 종말 같은 경치라네.

145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인간 그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릴 것 같아.

146

여자들에겐 예쁜 서랍이 달려 있고 그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지. 나는 그런 것이 아주 좋아. 나는 그런 잡동사니 하나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내줄 수 있다네. 섹스어필의 본질이란 요컨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지. 그 다음은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147

아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에게 쓰는 편지조차 아닌 것 같네. 이건 아마 우체통에게 보내는 편지일 거야.

148

그녀는 벌써 나흘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냉장고 속에서는 우유가 고약한 냄새를 뿜어내고, 고양이는 항상 배고파 하고, 세면대에 놓여 있는 그녀의 칫솔은 화석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런 집 안에 아련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햇빛만은 언제나 무료다.

151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내 마음을 흔들고, 내 마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마저 흔드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잃어야 했기에 잃은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말고 나에게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155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교체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을 더 허물어서 바다를 메우고, 더 빨리 달리는 차가 발명되고 더 많은 고양이가 치여 죽어. 그뿐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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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은 조금씩 변하지만 평범함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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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가능한 한 정직하게 이야기하려 합니다"라고 남자는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공문서를 직역한 것 같은 말투였다. 어구의 선택과 문법은 정확했지만, 말에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요. 정직과 진실의 관계는 선두와 선미의 관계와 비슷하지. 먼저 정직함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진실이 나타나는 거야. 그 시간적인 차이는 배의 규모에 정비례하지. 거대한 사물의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법이요. 우리가 생애를 마친 다음에야 겨우 나타나는 것도 있지.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도 당신의 책임도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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